2024. 8. 25. 18:10ㆍ화보, 인터뷰 Photoshoot & Interview/2010-2019
황량한 벌판 위 서커스 천막에서 만난, 화려한 무대 분장과 섹시한 하이힐의 아름다운 쇼걸. 팔색조 같은 매력을 뽐내는 이효리의 쇼 타임!
4월 4일 오전 9시, 인천 공항 근처 어느 벌판. 초록색 블록 중간쯤으로 표시된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주소를 따라온 촬영 스태프들의 차량들이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다. 촬영 장소는 아주 멀리 보이는 인천 공항을 제외하곤 사방 몇 킬로 근방에 어떤 구조물도 보이지 않는 곳. 일반 모델도 아니고 감히 이효리에게 이곳까지, 그것도 오전 9시 콜 타임이라니! 어쨌든 오랫동안 준비해온 블록버스터급 화보 촬영에다 패션뮤직 필름까지 촬영해야 하고, 모든 것은 해 지기 전에 이뤄져야 하니 눈 딱 감고 촬영 시간을 일찌감치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현장엔 서커스 천막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영화 조명팀은 거대한 HMI 장비들을 트럭에서 내려 세팅 중이었으며, 촬영팀은 컴퓨터 테이블을 세워 카메라와 장비들을 연결했고, 방금 샤워를 마치고 온 듯 맨 얼굴의 이효리는 메이크업 밴에서 젖은 헤어를 말리고 있었으며, 그녀와 언제나 함께인 강아지 순심이는 모처럼 신이 난 듯 벌판을 잘도 뛰어 다녔다. 햇빛까지 쨍쨍 내리쬐니 할렐루야!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나머진 준비한 만큼 순풍에 돛 단 듯 잘 흘러갈 것이다. 여왕의 귀환을 맞을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이번 촬영은 두 달 전, 이효리의 절친 디자이너, 요니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효리가 지금 새 앨범을 준비 중인데 <보그>와 멋진 화보와 패션 필름을 찍고 싶어 해요!” 2년 넘게 준비한 5집 앨범의 대대적인 홍보를 패션 바이블 <보그>와 함께 시작하고 싶다는 것. 참고로, 3년 전 <보그>는 창간 기념 특집으로 국내 최초로 패션 뮤직 필름들을 제작한 적 있었는데, <보그> 스타일의 화보들을 흘러간 가요(나미의 ‘빙글빙글’, 신중현의 ‘미인’,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 등등)에 접목함으로써 큰 화제가 됐었다. 이효리와 요니는 그 패션 필름들을 본 후 <보그>와 작업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한다. 어쨌든 패션 화보 메이킹 필름에 새 음반의 노래를 담아 그동안 어떤 가수도 시도해 본 적 없는 특별한 패션뮤직 필름을 찍고 싶다는 그녀! 과연 디바다운 패셔너블한 발상이었다.
마침 밀라노 출장 중이었던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촬영팀을 세팅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사진가는 <보그>팀은 물론 이효리와도 오랜 작업으로 손발이 척척 맞는 홍장현 실장. 헤어와 메이크업 역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한지선과 홍성희 실장이 맡기로 했다. 사진가와 촬영 컨셉에 대해 얘기가 오가던 중, 요니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효리가 직접 〈보그〉 촬영팀을 만나고 싶대요. 다 함께 미팅을 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죠?” 물론 OK! 홍장현 스튜디오에서 만난 날 저녁, 순심이와 함께 나타난 그녀는 자신이 찍고 싶은 화보에 관해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뭔가 느낌이 강하면서도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진은 무드가 넘치지만 위트 있고, 포즈도 좀더 자연스러웠으면 해요. 결론적으로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화보를 찍고 싶어요.”
그녀는 이번 화보 촬영에 아주 큰 기대와 열정을 갖고 있었다. 일단 그녀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기로 하고 헤어진 후, 사진가와 나는 몇 번의 미팅을 통해 촬영 컨셉을 다듬어 나갔다. 요즘 트렌드인 60년대? 뮤직 아이콘? 아니면 쇼걸? 맞다! 쇼걸은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지닌 섹시 디바, 이효리만이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 아닌가. 우린 레트로풍의 ‘쇼걸’로 의견 일치를 본 후 장소를 찾았다. 파리의 물랭루즈나 리도쇼의 백스테이지 정도는 아니더라도, 화려한 의상과 소품들이 어울리는 공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와 흡사한 장소는 없었다. 특히 일반 공연장들의 백스테이지는 전혀 멋지지 않았다. 조명도 설치해야 하는데다 잘못하면 스튜디오 세트보다 나쁜 결과가 나올 게 뻔했다. 화보는 어차피 렌즈 속 좁은 세상이니 어찌어찌 촬영한다 하더라도, 촬영 환경이 그대로 노출되는 패션 필름 촬영이 더 문제였다. 비용이 들더라도 자연광이 들어오는 영화 촬영장이나 창고에 세트를 꾸며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10 꼬르소 꼬모에서 열린 피터 린드버그 사진전의 한컷이 생각났다. 영화 촬영장인 듯한 야외 촬영장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밀라 요보비치의 흑백 사진! 바로 그거였다.
나는 거기에 팀 워커 스타일의 세트 아이디어를 더하기로 했다. 텅빈 넓은 벌판 위에 세워진 서커스장과 그곳 백스테이지라면 어떨까? 이효리가 원하는 무드와 유머, 그 밖에 다양한 설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벌판이야 인천 공항 근처에 가면 얼마든지 널려 있을 것이고, 거기에 간이 서커스 세트를 뚝딱 세우고 그녀를 공연 준비 중인 무희로 변신시키면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았다. “와, 정말 근사할 것 같아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효리의 모습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사진가 홍장현의 머릿속에 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찰나, 때마침 스마트폰으로 이효리가 사진을 전송해왔다. 린드버그가 야외에서 촬영한 흑백 화보 한 컷. 이건 그녀와 우리 사이의 운명의 텔레파시였다!
다시 촬영 당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모든 스태프들이 모여 준비를 시작한 지 2시간 후, 첫 컷 촬영이 시작됐다. 비즈 장식이 화려한 보디수트에 오버 사이즈 트렌치코트를 걸친 섹시한 무희 이효리가 등장하자, 모두는 입이라도 맞춘 듯 “와, 멋져요!”라 외쳤다. 봄이긴 하지만 4월초의 날씨는 매서웠다. 그야말로 꽃샘추위가 한창인 쌀쌀한 날씨(가만히 있으면 손이 꽁꽁 얼 정도). 그녀는 노련한 모델도 견디기 힘든 얇디 얇은 드레스와 보디수트 차림.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씩하게 대답하며 카메라 앞에서 여유 있게 포즈를 취했다. 사실 전문 모델이 아니면서 포즈를 그리 자유자재로 취할 수 있는 셀러브리티는 처음봤다! 그녀는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깔깔 웃으며 뛰어다니기도 했고, 사연 많은 여인처럼 담배를 한 모금 빨아 길게 내뿜는 연기도 했다(쇼걸로 빙의한 듯,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맘껏 드러내며 섹시 디바의 이미지를 한껏 뿜어낸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오후가 되자 날씨도 조금 풀려 우리는 계획한 대로 어떤 훼방꾼(허허벌판이었기에)도 없이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사진가 홍장현은 즉흥적으로 포즈를 끌어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 작업처럼 미리 밑그림을 꼼꼼하게 그린 후 콘티대로 촬영하는 방식을 즐기는 사진가. 이효리의 경우엔 그런 촬영 방식이 큰 도움이 됐다. 미리 포즈를 구상하고 거기에 그녀만의 아이디어를 더할 수 있었으니까.
이효리가 누구인가. 지난 2년간 봉사와 기부, 그리고 건강한 아름다움의 아이콘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멋진 수식어들과 함께 숨가쁘게 살아온 그녀(실제로 그녀는 주말마다 유기견 보호와 동물사랑을 실천하는 동물애호가, 육식의 유혹 앞에서 갈등한다고 고백하는 솔직한 채식주의자로 유명하다). 이제 그녀는 새 앨범으로 다시 한번 무대 앞에 서길 원한다(5집 앨범은 5월 중에 공개된다!). 그리고 그날 <보그> 카메라 앞에선 이효리는 분명 디바의 자리로 되돌아갈 완벽한 채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촬영 중간중간 드라이어로 손을 녹이고 휴지로 코를 닦을지언정 전혀 불평하거나 응석 부리지 않았고, 스스로를 너무 늙었다고 자조하면서도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지도록 환하게 웃으며 촬영을 즐겼다. 유행 지난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도 외출할 수 있는 여자, 하지만 화려한 조명이 늘 뒤쫓는 스타. 밤새 수다 떨며 깔깔댈 수 있는 친한 여동생 같은 여자, 하지만 농염한 자태와 팔색조처럼 변하는 카리스마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디바. 그게 바로 이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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